March 22, 2024

계3:14-22

본문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충지였고,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고, 안약으로 유명했고, 의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교회는 에바브라가 세웠다고 보는데요.

골4:12-13=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와 골로새 근처에 있는데 바울이 골로새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를 지도했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라오디게아교회에 책망하시며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한다.”고 하셨습니다.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은 “엉터리로 믿을 바에야 안 믿는 것이 낫다.”는 말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머리는 냉철하고, 가슴은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거죠.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미지근하여”라는 언급은 라오디게아교회의 영적상태가 무익하고, 무력함을 나타내는 말이죠. 히에라볼리에는 온천이 있는데 거기에서 끌어온 온천수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끌어오는 찬물을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마시는 자마다 토하여 버렸다고 하죠. 이렇게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미지근한 물을 토해 버리듯이 예수님께서도 미지근한 영적상태에 머물러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버리겠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가 부요하여 더 바랄 것이나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죠. 그러나 영적으로는 매우 빈곤하고, 곤고하였습니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돈이 아니라 믿음에 부요하고, 의의 옷으로 수치를 가리고, 안약을 사서 눈을 고치라고 하죠.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서 “사랑”이라는 단어는 “필로-φιλω”를 썼는데 필로는 “아가페”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종종 “필로”는 “아가페”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죠. 사랑하기에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고, 그래서 회개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회개하고,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라고 하죠.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 부자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다고 하시며 회개하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교만했는데요.

그들이 교만하여 어떻게 되었습니까?

– 곤고해졌습니다.

– 가련해졌습니다.

– 가난해졌습니다.

– 눈이 멀었습니다.

– 벌거벗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면 어떻게 됩니까?

– 부요하게 됩니다.

– 수치가 가려집니다.

– 영안이 열립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람은 교만할 때 불행해지고, 겸손할 때 가장 행복해집니다. 교만은 불행과 실패의 최대 원천이고, 겸손은 행복과 성공의 최대 원천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언제나 맞아주실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20=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사실이 얼마나 힘과 용기가 됩니까? 가장 야단을 많이 받는 라오디게아 교회도 하나님이 그처럼 놀라운 축복의 기회와 가능성의 문을 열어 두셨다면 우리에게도 그런 축복의 기회와 가능성은 여전히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질투해서 죽였지만 하나님은 가인을 찾아가셨고, 용서의 표를 주어 죽임을 면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죠.

20절에서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 모습은 믿지 않는 자의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는 불신자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믿는 자의 문을 두드리는 장면입니다. 그 예수님의 노크소리를 듣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얼마든지 다시 복된 자리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