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il 10, 2024

창7:1-12

1=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여기에 “보다”라는 단어는 “라아-רָאִ”라고 하는데요. “인정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셨다는 뜻입니다.

2=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 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홍수심판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지시를 내리셨죠. 정결한 짐승은 암 수 일곱씩 취하라고 했는데요. 여기에는 학자들에 따라 이견을 보이고 있습니다. “칼빈”이나 “랑게”같은 주석가는 일곱씩을 세 쌍과 여분의 한 마리로 보는 반면에 70인역은 “일곱 쌍”으로 14마리로 보고 있습니다. 칼빈의 견해가 옳다면 여분의 한 마리는 후일에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기 위한 것으로 추측이 되기도 합니다.

3= “공중의 새도 암 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이유는 “유전케 하라.”는 것입니다. 생태계의 보존이란 측면과 함께 홍수이후 사람들의 생활을 돕기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죠.

4= “지금부터 칠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지금부터 칠 일이면” 이 말은 심판을 위한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최후통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판을 처음으로 언급하신 것은 120년 전이었지만 인간들에게 120년이란 회개의 기간을 허락하시고도 이처럼 마지막 한 주간의 기회를 더 주신 거죠.

그리고 “사십 주야에 비를 내리신다.”고 하셨죠.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은 때로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요. 특히 40은 “시련”과 “연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모세의 40년간 광야생활, 예수님의 40일 금식기도가 있죠. 그렇지만 성경의 시련과 연단의 끝은 승리와 기쁨이 기다리고 있죠. 시련으로 끝나지는 않습니다.

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한 치도 벗어남이 없이 철저하게 순종하였습니다. 노아는 순종의 사람이죠.

6=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육백 세의 나이는 적은 나이가 아니죠. 노년에 이른 노아가 1년 동안이나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을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죠. 크루즈여행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배안에서 1년을 보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7=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노아만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세 아들들, 세 며느리들도 믿음이 좋았습니다. 롯의 사위들과는 대조적이죠. 롯의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듣지 않고, 농담으로 여기고, 피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에 타서 죽고 말았죠.

9-10=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 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칠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이렇게 심판 가운데 믿음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짐승들도 짝을 맞추어 방주 안으로 들어감으로 생태계의 보존도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1-12= “노아 육백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는 말은 폭우와 함께 해일, 지하수의 범람까지 온 땅이 물로 뒤덮였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하늘의 창들이 열렸다.”는 말은 마치 댐이 열려 물이 쏟아지는 것처럼 엄청난 양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노아를 보면서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은 믿음입니다.

성자 프랜시스에게 어느 날 제자가 되겠다고 두 사람이 찾아와서 “선생님의 제자가 되고 싶으니 받아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프랜시스는 “여기 배추가 있는데 이 배추를 저 밭으로 가져가서 뿌리를 하늘 쪽으로 심고 오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한 사람은 말없이 배추를 들고 나갔는데요. 다른 한 사람은 “이 사람이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만 정말 정신이 돌았구먼!” 이렇게 비웃고,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프랜시스가 왜 이런 무리한 요구를 했을까요? 제자로 삼기 전에 순종의 자질이 있는가? 어떤 명령을 해도 순종하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있는가를 테스트한 거죠. 여러분, 우리는 순종의 자세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울은 순종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불순종하여 불행을 겪게 된 거죠.

삼상15:23=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된 거죠. 아담하와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에 불순종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죠. 불순종이 가져온 비극입니다.

사1:19= “즐겁게 순종하면 땅에서 나는 가장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요.”

말씀에 순종하는 만큼 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은 최고의 복입니다. 순종은 축복의 통로입니다. 순종하여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