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19:1-7
본문에는 친구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삼는 것이 좋을까요?
1>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 좋습니다.
1= “성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보다 나으니라.”
1절은 “성실하게 행하는 자”와 “입술이 패려하고, 미련한 자”를 대조하고 있는데 좋은 친구는 입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겠죠. 저속한 말을 하는 사람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난하지만, 성실한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친구를 사귀려면 돈이 많은 타락한 사람보다는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사는 사람을 택하라는 거죠.
외국 여행을 좋아하는 프랑스의 어느 소설가가 여행하는 중에 식당에서 버섯요리를 시켰는데요. 주인이 불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종이에 버섯을 그리자, 주인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더니 우산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죠. 그러므로 자기 기준으로 쉽게 판단하고, 함부로 남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2>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2=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 하느니라.”
소원 중에는 잘못된 소원도 많습니다. 잘못된 소원을 가지고 살다가 잘못된 길로 가죠. 세상의 욕망을 채우려고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떠나서 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신중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행동하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죠. 이런 사람과 친구로 지내는 것은 좋지 못하다는 겁니다.
3=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
이렇게 자신이 잘못하고도 나중에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언약궤만 가져오면 전쟁에서 이길 줄 알고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갔지만 어떻게 되었죠? 언약궤를 빼앗기고, 전쟁에도 지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지, 언약궤만 들고 간다고 이길 수 있습니까? 대패하고, 언약궤마저 뺏기죠. 잘못된 확신은 더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소원도 믿음 안에 있는 소원이 아름답고, 행동도 믿음 안에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는 원망하는 사람보다는 감사가 넘치는 사람이 좋습니다. 원망은 원망을 낳게 되죠.
3> 진실한 사람이 좋습니다.
5= “거짓 증인은 벌을 면치 못할 것이요, 거짓말을 내는 자도 피치 못하리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 있죠. 이런 사람을 친구로 사귀면 되겠습니까? 친구는 서로가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친구를 잘 사귀어야죠. 다윗에게는 신실한 친구가 있었는데 친구 요나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울의 공격을 여러 번 피할 수 있었죠. 그리고 요나단도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원수이지만 다윗을 아껴주는 정말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죠.
4>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좋습니다.
6=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그래서 좋은 친구 얻기를 원한다면 나눠주는 사람이 되고, 마음을 너그럽게 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밴댕이 속처럼 좁으면 누가 친구가 되려고 하겠어요? 물론 친구는 주기만 해도 안 되고, 또 받기만 해도 안 되겠죠. 서로 주고받을 줄 알아야 좋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죠. “진짜 좋은 친구가 되려면 줄 때는 최대한으로 주려고 하고 받을 때는 최소한으로 받으려고 하라.”
중국 제나라에 관중과 포숙이란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동업할 때 포숙은 자기 몫을 더 많이 챙긴 관중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관중이 자기보다 가난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중이 여러 번 관직에서 파면될 때도 친구의 무능함을 욕하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나 불운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관중이 전쟁 때마다 도망을 쳤어도 친구를 비겁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관중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천하를 움직이는 정치가가 된 관중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를 낳아 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었다.” 여러분, 좋은 친구는 물질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친구를 알아주는 것도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서로 나누고, 알아주는 이 둘은 다 중요한 것입니다.
한문으로 친구를 ‘지기’라고 하죠. ‘지기(知己)’라는 말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란 뜻이죠. “10년 지기”, “50년 지기”라고 하는데요. 10년 동안 서로를 잘 아는 사람, 50년 동안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란 말 아닙니까? 이렇게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가 오랫동안 곁에 있어 주는 것은 행복의 큰 요소입니다.
‘죽마고우’(竹馬故友)라는 말도 있죠. 어릴 때 함께 말을 타던 오래된 친구라는 뜻이죠. 어떤 사람은 “죽마고우”를 “죽치고 마주 앉아 고스톱 치며 우정을 나누는 친구”라고 하는데요. 그러나 진짜 “죽마고우”는 “죽기를 각오하고, 마음을 주고, 고통을 나누고, 우정을 나누는 친구”라고도 하죠. 아무튼 친구는 중요한데요. 친구는 ‘또 다른 자기’입니다. 그래서 사람됨을 보려면 그의 친구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친구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에 가서 열심히 선교사역을 하고 있는데 본부와 마찰이 생기자, 경고장이 왔습니다. 선교본부를 탈퇴하든지, 아니면 진행하던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순종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는 편지였습니다. 그 통지를 받고, 절망에 빠졌죠. 얼마 후에 그는 또 한 장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영국에 있는 애인의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그만 사귀자는 절교 편지였습니다. 그는 더욱 깊은 낙심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선교를 포기하고 싶었고, 삶까지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를 건진 사람은 20살이나 많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윌리엄 번스라는 친구 선교사였습니다. 번스는 테일러의 능력과 가능성을 알아주고, 자기보다 젊은 테일러를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번스는 테일러에게 자주 이 두 가지 말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나는 자네를 믿네(I trust you).”, “나는 자네를 따르겠네(I will follow you).” 그러자 테일러는 회복이 되었고, 그렇게 위대한 선교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테일러에게 번스라는 좋은 친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어요?
좋은 친구가 되고, 또 좋은 친구를 만나서 하나님의 나라에 쓰임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