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2:11-13

11=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이르렀으니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이들의 인적 사항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욥기를 보면 몇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이들은 욥보다 연장자였습니다.

욥15:10=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욥보다 어린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는 않죠. 이들이 욥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둘째, 이들은 서로 알던 사이였습니다.

욥2:11= “그들이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이들은 욥을 방문하기 전에 서로 상약했다고 하죠. 무작정 온 것이 아니라 미리 약속을 잡고 왔습니다.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이들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대화나 논쟁을 보면 나름대로 정확한 논리와 풍부한 지식이 있음을 알 수 있죠.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넷째, 이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욥의 신앙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공의, 성품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신앙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말이 욥에게 맞는 말일까요? 친구들은 한마디로 “상선벌악”을 주장하고 있죠. 일반 상식으로는 그들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뒤에 가서 보면 욥에 대한 친구들의 말이 정당하지 않다고 밝히고 있죠. 그러니 친구들의 잘못이 무엇이죠? 일반적인 상식으로 욥의 특수한 경우에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 잘못이죠. 그들이 말이 무조건 다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8장에 나오는 빌닷의 말입니다. 빌닷의 변론은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요.

첫째, 이분법적인 사고로 욥을 비난하였습니다.

빌닷은 사람을 “순전한 사람”과 “사곡한 사람”으로 분류하면서 순전한 사람은 흥함(축복)을 받고, 사곡한 사람은 재앙(멸망)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빌닷의 말들을 보면 그는 욥에게 좋은 조언자(위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병에 걸린 욥을 이해하는 동정심과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비난하는 투로 변론하였습니다.

둘째, 욥을 큰 죄인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8: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8:4=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

율법의 잣대로 욥과 욥의 자녀를 죄인으로 몰았는데요. 사실은 그렇지가 않죠. 욥은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범죄하지 않도록 수시로 점검하였죠.

욥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그런데 빌닷은 욥과 자녀들을 큰 죄인이나 된 듯이 취급하고 있죠. 그러니 빌닷이 하는 말이 다 옳은 말은 아니죠. 이런 배경 속에서 빌닷이 한 말을 생각해 봅니다.

특히 8:7절은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씀이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런데 이 말은 욥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지금 욥은 아주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습니다. 재앙으로 큰 고통을 받는 중입니다. 무슨 사업을 시작하고, 무슨 좋은 일을 시작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시련을 겪고 있을 때입니다. 이럴 때 욥에게 한 말이죠. 그러니까 개업식이나, 결혼식이나, 좋은 일에 적용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거죠. 문맥을 무시하고, 7절 말씀이 좋다고 앞뒤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인용할 때 항상 문맥을 살피고, 상황에 맞게 바르게 사용해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욥은 본래부터 유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욥1:1-3=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그 소생은 남자가 일곱이요, 여자가 셋이며, 그 소유물은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욥은 신앙도 좋고, 자녀들도 많고, 재산도 많은 동방의 갑부였는데 갑자기 재난이 닥쳐온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가축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육체는 병이 들었고, 부인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바가지를 긁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욥이 죄를 지었거나 자녀들에게 죄가 많아서 생긴 일이 아니죠. 욥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자랑하시자 사탄이 욥을 시기하여 헐뜯다가 생긴 일이죠. 그런데 그런 배경을 무시하고, 빌닷은 자기 생각으로 욥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5절부터 제대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5-7= “네가 만일 하나님을 부지런히 구하며 전능하신 이에게 빌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 말씀이 시작은 작아도 나중은 잘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중이 잘되려면 조건이 있는데 빌닷이 말하는 그 조건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정직해야 하고, 청결해야 하는데 그러면 무엇을 시작해도 마침내 잘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보면 현재 욥이 고생하는 것은 뭔가 잘못하였기 때문에 얻은 결과라는 말입니다. 자녀들이 죽은 것은 자녀들의 죄 때문이고, 재산이 다 날아간 것도 욥의 죄악 때문이니까 욥이 바르게 살지 않았다는 주장이죠. “당신이 바르게 살았는데 왜 이렇게 되었느냐?” “바르게 살지 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한 거야!” 이런 말입니다.

아무튼 빌닷은 욥의 경우를 이해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상식으로 욥과 자녀들을 비난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욥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다 죽게 생겼는데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네가 바르게 살았다면 왜 이런 꼴이 되었겠냐?” 이렇게 말하면 위로가 되겠습니까? 기분을 잡치는 말이 되겠죠. 그래서 말씀으로 남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남을 격려하고, 축복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